그 유명한 욥기 2장 10절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게 또 무슨 고백인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욥은 내가 중심이었어요.
나한테 좋은 것 주시면 할렐루야
내게 나쁜 것 주시면 놀렐루야
내게 좋은 것 주면 아멘
내게 나쁜 것 주면 노맨
그랬다고요 내가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뭐가 바뀌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 화를 주신 분도 하나님
나한테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라
좋은 거 주신 분도 하나님, 나쁜 거 주신 분도 하나님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시각이 이동했어요.
이게 큰 변화입니다.
지금까지는 욥은 나를 중심으로
내게 좋은 거 나쁜 거 이것이 기준이었습니다.
이 순간 기준이 바뀌었어요.
좋은 거 주신 분도 하나님,
나쁜 거 주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늘 좋은 거 주셨는데
때로는 나쁜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
그럼 나쁜 거 주신 하나님이 뭔가 의미가 있겠지,
뭔가 뜻이 있겠지 이러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가까이해요.
자신의 운명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스스로 의미가 있는 법이오.
좋은 일 속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놓지 않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인생은 고통을 감수하고
고통을 감당하고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시기도 있는 겁니다.
인생의 좁은 풍파가 왔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지극히 계산적이고 까닭 있는 신앙이 아닐까요?
매를 맞았다고 하나님 품을 떠난다면
어린아이만도 못한 신앙 아닐까요?
여러분~ 농부가 곡식을 키질하는 걸
한번 상상해 보세요.
곡식들을 주목해 보세요.
곡식들이 키질을 당할 때 농부에게
등을 보이는 곡식들은 결국에 날아갑니다.
쭉정이예요.
그때 농부에게 가슴을 보이는
곡식이 있어요.
그 곡식은 남아요. 그게 알곡입니다.
우리 인생이 마구 흔들릴 때
마치 곡식이 농부한테
키질당하는 것과 같아요.
요 흔들리는 이 순간
등을 보이면 쭉정이 되는 거고
가슴 보이면 알곡 될 줄로 믿습니다.
흔들리는 그 순간,
내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게 검증하는 시간입니다.
고난이 올 때 더 경건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등을 보이지 말고
가슴을 보이세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더 가까이 파고 들어가세요.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온기를 더 따뜻하게 느끼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한번 따라 할까요?
모든 고난은 과정이지 마지막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일을 당했을 때
여기서 내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 인생 끝나나? 그것 때문에 괴로워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모든 고난은 그게 과정이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고난은 끝이 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고난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고난은 나보다 먼저 돌아가십니다.
내가 고난보다 장수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그 고난의 끝점이 있다고요.
나는 걔보다 오래 산다고요.
이게 모든 고난은 끝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고난의 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점을 당기는 사람이 있고,
여기서 내 인생 끝난다라고 생각해서
끝점을 더 미루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모든 고난은 끝이 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고난 이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를 끝까지 읽어볼게요.
욥기 42장 10절을 보시면
욥이 건강이 회복됐습니다.
소유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 말하네요.
욥기 42장 12절을 보시면
재산이 완전히 2배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자녀도 다시 10명을 주셨어요.
물론 죽었던 7남 3녀가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닙니다
안고 살아야 됩니다. 그 상처는 트라우마로 간직해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려고
또 다른 7남 3녀를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욥이 사는 동안 욥의 고난은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42장 맨 마지막 절 16 17절입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의 과정이지
마지막이 아니었어요.
욥은 고난의 끝점 이후까지 살아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의 터널을 허락할 뿐이지
절망의 동굴로 밀어 넣지 않아요.
고통의 터널과 절망의 동굴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거예요.
절망의 동굴은 출구가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터널은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있는
그 어두움이 이게 터널인지 동굴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어두움
앞에서는 움츠립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평소 하나님은 우리 오른쪽에서
당신의 왼손으로
우리 오른손을 잡고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앞에 어두움을 만나서 전진할 수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은 위치를 바꾸셔요.
앞장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우리 오른손을 잡으십니다.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인도하듯이
터널 안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 문제 속에서 앞이 캄캄할 때,
이 앞에 있는 어두움이 이게 터널인지
동굴인지 구분이 안 될 때
터널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오른손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도 붙잡아야 돼요.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하는 거
내가 근심하는 것은 본심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은
8년째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 1위로 채택됐어요.
이 말씀 두 개를 붙잡고 묵묵히 가는 겁니다.
앞에 있는 어두움은 동굴이 아니에요.
터널입니다. 처음에는 어둡습니다.
중간까지 어둡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다 보면
터널의 끝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터널을 걷다가 중단하면 그곳이 곧바로 동굴로 변해요.
그렇게 멈추면 안 됩니다. 그냥 어두워도 가야 됩니다.
가다 보면 터널의 끝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멈추면 동굴이에요.
끝까지 가면은 터널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절망의 구름이 거치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인이에요.
♣ 내일은 목사님 설교 초반부에서 나왔던
울던 여자 집사님이 누구신지 간증을 보내드릴게요
ㅎㅎ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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