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극동방송 새벽예배에서는
한국교계의 큰 울림을 남기셨던
원로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들려주는데요
고 한경직 목사님(영락교회)께서
동정심(로마서 12:15)이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제게 도전이 되어서 전해드립니다
동정은 생의 원칙입니다.
동정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또한 장성하게 합니다.
인간 생활에는 불의의 재난, 슬픔, 고통이 많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피차에 동정으로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자들과 같이 즐거워할 때에
그의 즐거움은 배가 되고
그런 즐거움에 동참할 때에 나에게도 즐거움이 커집니다.
또 반면에 슬픈 일을 당할 때에 그를 동정하여
같이 슬퍼하는 이가 있으면 슬픔이 반감되어
우는 친구가 그 슬픔을 나누어 가는 것입니다.
그 슬픔을 나누어 가는 그 자신도 위로를 받고,
그런 심령은 더욱 장성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사실 고독한 경험이올시다.
사실 그것을 당하는 나만 압니다.
그런데 그 슬픔과 고통의 몇 분지 일이라도
알아주고 같이 아파하는 이가 있으면
그만큼 그 고통이 덜어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 나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평안하나 내일 무슨 불행이 올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실패, 질병, 슬픔, 무슨 고통이 올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남의 사정을 알아 남을 동정할 줄 알 때에
또한 남이 나를 동정해서 나의 고통을 덜어줍니다.
동정심은 우리 삶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생의 한 법칙입니다.
동정심은 신앙과 그 인격의 척도가 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에 있는 흑인들을 동정해서
남북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흑인 노예를 해방하였습니다.
또 슈바이처 같은 이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들의
가련한 생활을 동정해서 고국을 떠나
일생을 아프리카 밀림 가운데서 살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돈독한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의 동정심은 전인류에게 미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 미칩니다.
전인류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이요,
전인류의 슬픔이 주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정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
그 심도가 얼마나 깊은가?
우리의 동정심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우리의 인격과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동정심은 인간의 심령 속,
그 깊은 곳에까지 미쳐서
그 영혼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죄악에 묻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심령을
우리가 얼마나 깊은 동정심으로 봅니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애를 씁니까?
복음을 자유로이 듣지도 못하는
북한 동포들의 심령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애탑니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심령들을 위하여
얼마나 민망히 여깁니까?
깊은 동정심이 움직이는 이것은 우리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또 큰 재난이 올 때에 그 사회가 얼마나 상부상조하여
그 상처를 복구하여 주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기를 힘을 쓰십시다.
이것도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다른 이들은
다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맏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즐거워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밭에서 돌아오다가 그 말을 듣고
집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힘쓰지 아니하면,
맏아들의 실수를
우리도 반복하기 쉽습니다.
남이 성공할 때에 같이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사랑이 부족한 데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즐거워하는 자들과
언제나 같이 즐거워하기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픔의 짐, 빈궁의 짐, 질병의 짐, 실패의 짐,
재난의 짐, 고독의 짐을 같이 지도록 힘을 쓰라고 권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있던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한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역시 그저 지나갔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행로에 강도를 만나 혹은 천재지변을 만나
쓰러진 인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다 이러한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제사장처럼 레위 사람처럼 그저 지나가지 마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도 인생행로를 걸어갈 때에
주님의 이 음성에 순종하는 생활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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