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목 목사님 말씀

하나님이 선하신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요한복음 16:33).......이종목목사

유보배 2016. 2. 25. 06:30



할렐루야~~하나님은 언제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위로하십니다

오늘은 이종목목사님의 '현대인의 8가지 질문' 중 하나님이 선하신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우리는 22개월 전 일어났던 ‘세월호 침몰사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난 것도, 큰 해일이 일어난 것도, 구조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476명 중 사망자 295명 실종자 9명 합하여 꽃다운 아이들 314명을 잃었습니다.


돈에 어두운 악덕 기업, 관리감독에 소홀한 정부, 승객들을 남겨둔 채 사명감 없이 먼저 피하던 선원들에게 우리는 분노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으셨나요?”

“왜 그냥 내버려 두었나요”

“하나님, 저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우리는 갑작스런 질병, 깨어진 관계, 쓰라린 배신, 실패와 실망, 범죄와 죽음 등을 겪을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저입니까?”

“왜 지금입니까?”

어쩌면 “왜”라는 질문은 인류역사와 함께 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욥기서와 시편의 탄식 시에 “왜”란 질문이 잘 나와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1,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대량학살(genocide), 캄보디아의 지식인, 성직자, 소수민족자 등 100만 명 이상을 죽인 킬링필드, 르완다와 시리아의 내전, 아프리카의 기근, 에이즈의 출현과 전염병 등...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안산의 단원고 옆에 명성교회가 있습니다. 김홍선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던 학생들 중에 6명이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되었습니다. 김목사님은 힐링센터를 세우고 유가족을 위한 회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한 학부모가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제가 100일 기도를 하는 기간에 제 아이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도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아렸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락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건가요?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만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억압당하고 고통 받아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인생의 문제에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누구나 당혹스럽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내가 고통의 이유를 알면 하나님이 있는 것이고, 이유를 모르면 하나님이 없는 것인가요?

얼마 전에 TV에서 <장영실쇼-광유전학, 빛의 과학, 21세기 열다>라는 주제로 토론이 있었습니다

광통신은 빛에 데이터를 실어 보내는 기술로 Li-fi 가 Wi-fi 보다 100배나 빠르다고 합니다.


광 의학은 빛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기술로 심지어 사람의 신경세포 안의 단백질을 조절한다고 합니다.

광통신과 광 의학에서 쓰이는 단위도 NANO(10억 분의 1초)뿐 아니라 FEMTO(1,000조 분의 1초)를 씁니다.

원자(초당 1KM의 속도)와 분자(1천억 분의 1초)의 충돌을 관측하는 것이지요.


저는 광통신과 광의학에서 쓰이는 용어들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는 실존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21세기를 빛의 과학이 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 눈으로 보고 이해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제한된 사고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지성으로 이해되어야만 신이 존재하는 건가요?

세상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에 기초한 진화론은 신뢰하면서도

세상의 강자가 약자를 소외시키고 억압하고 고통을 준다고

세상을 만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송경태(전북시각장애인 도서관장)씨는 군복무 시절에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실명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좌절하며 죽음을 생각하다가 6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는데 한 장애인이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도전을 받고 희망을 갖습니다. 삶의 목표를 세우고 ‘결혼, 대학진학, 컴퓨터 배우기’ 목표를 이룬 후 그는 다시 도전합니다.


‘마라톤 5km 완주, 시각장애인도서관 설립, 네팔 에베르스트 산 도전’ 그는 도전을 이룹니다.

전주 시의원에 당선된 후 다시 목표를 세워 ‘지구상 세 꼭지 점 밟기(남극, 북극, 에베르스트), 세계 7대륙 최고봉 도전,

장애인을 위한 희망센터 세우기’를 다 이루고 지난달에 '엄홍길 도전상'을 받았습니다.

원치 않았던 비극이였지만 그것을 통해서 얻게 된 삶의 통찰과 힘은 다른 것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고 해서 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닫혔지만 내면의 눈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악을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과 피조물을 사랑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형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희생하더라도 선택합니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 기쁘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악을 선택할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나요?"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기적으로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선택하며 어둠을 깨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통이나 악이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칩시다.

하나님이 고통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기시고 상관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환난이 있음을 인정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은 우리나라가 회색지대였습니다. 구정의 기쁨의 수면아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야기가 나오면서 급기야 정부는 극약처방을 합니다.

그동안 평화의 실험지요 통일의 숨구멍역할을 하던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24개의 기업과 하청업자들의 한숨이 들립니다.


미국은 한국에 미사일 요격부대 ‘사드’배치를 논의하고 일본은 남한의 동의없이 전쟁할 수 있는 빌미를 찾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중국의 미사일 부대가 무효화되기에 사드부터 공격할 것이니

그야말로 한반도는 전쟁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이 와중에 세계의 서민경제는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긴장과 고통스런 현실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

만일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비방하고 비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조금 화가 나지만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오랜 친구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화가 나고 인생이 허무해질 것입니다.


게다가 오랜 세월 함께 하던 배우자나 부모님이 우리를 배신하면 어떨까요?

그 슬픔과 고통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조롱과 제자들의 배신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립니다.


인류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심판 받으실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을 느꼈습니다. 

 3시간 동안 어두움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기도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끌어안으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으면

잔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은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게다가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영광과 희열이 있습니다.


저는 건강을 잃었다가 되찾은 성도님들이 일상에서 부활을 경험했다고 믿습니다.

이제 수술대에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성도님에게

 "건강을 잃었던 때와 다시 건강을 찾아가는 지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건강을 되찾으니 전보다 훨씬 더 깊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가족을 고맙게 생각하고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의 짐을 지시고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현재 평안을 주십니다.

미래를 이겨나갈 용기를 주십니다. 할렐루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나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여러분,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끝이 있습니다.

중간평가로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받는 환난은 잠깐입니다.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영광은 크고 영원합니다. 무게가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17).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은 홀로서기를 시도할 때 부모를 바라봅니다.

이때 스스로 잘하면 "아이 ~잘했다"고 칭찬해두면 다음에 신나서 더 잘합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이들의 정서에 좋습니다.


반면에, 아이는 자기가 잘 한 일이나 못한 일이나 부모님을 쳐다봅니다. 그때 눈이 마주치면 안정감을 갖습니다.

만일 부모님이 자기를 쳐다보지 않으면 ‘자기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부모의 시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똑같습니다.

고통스런 일이 있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싶어도 지켜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시선을 맞추시고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서 강제로 부모와 이별합니다.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13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는 애굽의 권위 있는 역할을 맡아 자기를 노예로 판 그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은 사람들의 악행만을 바라보지만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가장 사악했던 십자가의 사건을 역사에서 가장 좋은 일로 바꾸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고통을 통과할 때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이 필요합니다.

슬픔을 통과할 때는 '고통'을 '구속'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고통과 슬픔을 지나고 있습니까?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언제나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합니다.

다윗과 요한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오직 시선을 고정시키는 훈련장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그 사건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해라’고 말합니다.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어도...그만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고 위로하십니다.

사람들을 보내 함께 위로하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게 하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우리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고통중에도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